인도의 승려이자 철학자였던 나가르주나Nagarjuna(용수龍樹보살)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삶은 나약하고 곧잘 뒤집힌다.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물거품 마냥 불안정하고 들뜬다. 이번 호흡이 끝나면 반드시 다음 호흡이 이어진다고 믿는 사람들, 이 밤을 자고 나면 깨어나 새로운 아침을 맞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그들의 태연자약함이 참으로 경탄스럽다.” 라고. 인간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며, 그 인간의 삶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알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일깨우는 경구警句이다.
삶이 그러하다면 죽음은 어떠한가? 죽음의 의미는 문화와 종교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각 시각에 따라 죽음은 삶과의 단절이 될 수도, 이승 세계와 저승 세계를 잇는 강으로 상징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죽음으로 인하여 삶의 유한함이 극복되거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거나, 영생을 얻는 것은 지금의 삶이 아니라 삶 이후에 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불교에서는 미혹迷惑하고 번뇌煩惱로 가득한 현세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피안彼岸’의 세계를 동경하였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은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면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뜻하였다. 기후 변화와 같은 주변 자연환경에 의해 삶과 죽음이 좌우되었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민간신앙은 인간보다 오랜 생명력을 가진 거목居木이나 거석巨石에 영험한 기운이 서려있다고 믿고 숭배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돌은 견고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가지지 못한 불멸성으로 인식되었으며 바위는 영험함과 생명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바위로 만든 무덤인 고인돌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안식하는 곳이자 죽은 자의 혼령이 주는 나쁜 영향으로부터 산 자를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뿐 아니라 주검에도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죽은 자가 다시 활동할 수 없도록 주검을 땅 속에 매장한 뒤 그 위에 큰 돌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 사이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셈이다. 이외에도 고인돌은 부족 간 경계의 표식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또는 부족 의식을 치르거나 회합의 장소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권태균은 급변하는 시기였던 한국의 1980년대, 일반인들의 삶에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전국을 누비며 그 삶의 현장을 컬러와 흑백 사진으로 꾸준히 기록해 왔다. 특히 ‘권태균의 색’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색감과 빛의 조화로 이루어진 그의 컬러사진은 당대 생활상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작품들이다. 이번 <침묵하는 돌> 전시는 1980년대 중반, 우연히 전남 고흥반도에서 고인돌 군락을 발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진가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전국 곳곳 찾아다니며 기록한 작업 중에서 선별한 50여 점의 흑백과 컬러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고인돌은 돌의 부피나 무게만큼이나 엄청난 물리력과 인력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부족사회에서 막대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축조되었다. 그러나 그 형성의 배경과 의미가 퇴색될 만큼 무참히 훼손된 현재의 모습은 사진가에게는 너무도 쓸쓸한 풍경으로 비쳤을 것이다. 더 일찍 사진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진가로서의 자책감도 가졌을 것이다. 3만여 개라는 엄청난 숫자로 분포되어 있는 한반도 남한의 고인돌 군락지 중에서 고창과 화순, 강화도 일대가 2000년, 비로소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하게 된 것은 비록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권태균은 이 연작을 통해 고인돌 군락의 과거 규모나 위용을 우선적으로 드러낼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 포착된 고인돌은 새로 만들어진 집의 마당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뒷마당 채소밭의 울타리나 장독대가 되었으며, 벌판에 기울어진 안테나의 버팀목 역할을 하거나 한여름에 널찍하고 시원한 평상平床의 용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죽음의 군락지는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삶의 자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은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거나, 제자리에서 마치 마을을 지키고 있는 수호신이나 지역 경계의 표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예민한 시각을 가진 권태균이 발견한 고인돌 풍경의 현재적 의미로 해석된다. 현 세태를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자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터로써 고인돌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마늘을 캐다가 점심을 먹은 후 돌무덤들 옆에서 마치 시체처럼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사진은 그러한 시선이 흥미롭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 과거와 현재의 ‘관계로서의 풍경’ 이라는 특징 이외에도 이번 연작에는‘자연 풍경으로서의 고인돌’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원래 자연의 일부였던 돌을 캐어 와서 인공적으로 무덤을 만들어 거대한 군락을 조성하였지만, 당대의 위용은 사라져버린 고인돌이 다시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풍경들이다. 이끼가 끼거나 담쟁이 넝쿨, 잡풀로 덥힌 고인돌은 마치 다른 사물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 형태감이 잘 드러나도록 포착한 사진가의 위치에 의한 것이다. 각 고인돌의 크기와 독특한 형체는 때로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면서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내용상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 사진들은 차분하고 풍부한 흑백의 계조와 세부 표현, 색감 대비에 힘입어 그 의미와 상징성이 더욱 확장되기도 한다.
어떤 시대나 문화권에서 장례 풍습이나 무덤 방식의 변화는, 지켜왔던 전통과 가치를 포기할 만큼의 강력한 사회변동과 의식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현재 우리는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면서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거대한 돌을 이용해 더 이상 무덤을 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산을 오르면서 정성을 담아 작은 돌탑을 쌓기도 하고, 그 앞에서 합장하고 소원을 빌기도 하며, 바위에 상징적인 문구를 새겨 넣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여전히 소박한 형태로나마 돌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태균의 사진에서 오늘, 무시할 수 없는, 축적된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사진으로 주검이 묻힌 무덤 자리와 공존하는 현재 삶의 풍광을 기록한 그의 시선으로 인해, 마지막 호흡이 끓어질 때 바로 삶이 멈추듯이 어쩌면 죽음과 삶도 가까운 곳에서 마주서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앞에서 약간의 상상력이 발휘된다면 수천 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던, 영험한 기운을 간직한 ‘거대한 돌’이 전하는‘무언의 이야기’가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김소희 /고은사진미술관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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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균<침물하는 돌> 1997 나주 도곡
ⓒ 권태균<침물하는 돌> 1998 전북 순창
ⓒ 권태균<침물하는 돌> 2002 경주시 천북면 오야리
ⓒ 권태균<침물하는 돌> 2002 경북 청도 범곡리
ⓒ 권태균<침물하는 돌> 포항 기계
ⓒ 권태균<침물하는 돌> 해남 화산
권태균 TaeGyun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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