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노 피셔의 사진
위대한 것은 많으나 인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안티고네(Antigone)』, 소포클레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아르노 피셔는 “무명 사진가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진가”[1]였다고 한다. 누구에게 유명하고 누구에게 유명하지 않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1950년대 이후의 사진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진가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다. 피셔의 작품은 비단 동독에서만 최고의 명성을 구가한 것이 아니었다. 피셔가 인생의 가장 긴 나날을 동독에서 보내며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 후학 양성에 힘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피셔는 사진이 창조적이고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미디어라는 인식이 아직 희미하던 시절, 사진 역시 독자적 지위를 누릴 가치가 있는 예술 장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를 지닌 미디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1985년에야 비로소 동베를린에서 최초의 회고전을 열 정도였다. 당시 전시될 작품 대부분이 이미 완성된 상태였고, 피셔의 사회적 위상도 라이프치히 예술대학 교수라는 표면적 타이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 시절에 이미 지금의 위상을 누리던 인물, 즉 세속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망을 훌쩍 뛰어넘으며 당당히 우뚝 서 있던 존재였던 것이다. 피셔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좌파 성향에 어울리게 정재계 및 종교계 지도자들에 대해 늘 건전한 의심을 품었다. 아쉽게도 요즘은 그런 아티스트들이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지난 2세기 동안만 하더라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대도시로 부상한 베를린에는 그러한 예술가들이 넘쳐났다. 피셔 역시 가식이 없고, 자기 일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의 지혜가 넘치며,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풍부했던 예술가였다. 피셔는 또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듯 삶의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유머를 지닌 아티스트였다. 그런데 알다시피 유머와 멜랑콜리는 단짝이라 할 수 있다. 피셔의 작품에 늘 우수의 베일이 드리워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셔의 작품들은 순간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영원을 상기시킨다.
피셔의 가장 유명한 작품 시리즈 중에는 다섯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네거티브 필름 작품이 하나 있다. 세 장은 세로 포맷, 두 장은 가로 포맷으로 되어 있다. 해당 작품은 1978년 뉴욕, 맨해튼 남쪽의 스태튼 아일랜드 선착장에서 촬영한 것인데, 그중 두 쌍의 사진은 각기 몇 초의 간격으로 촬영한 것이고, 마지막 다섯 번째 사진은 완전히 다른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사진을 접하는 순간, ‘뉴욕 풍경을 이토록 탁월하게 포착할 수도 있구나’라며 감탄하게 된다. 빛나는 하늘을 수놓는 뭉게구름 몇 점이 황금비율 위치에 떠 있고, 그 아래로 광활한 도시의 전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왼쪽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고, 쌍둥이 빌딩을 품은 섬 남단 앞쪽에선 허드슨강과 이스트 강이 만나며, 우측으로는 퀸스와 브루클린이 보인다. 승선객 중 다섯은 철제 난간에 기대어 서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쌍안경으로 대도시의 실루엣을 관람 중이다. 다섯 명 중 넷, 그러니까 사내 둘과 여성 하나 그리고 어린 소녀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모두가 서로 얽히지 않은 채 따로따로이다. 시선이 엇비슷하게 교차할 뿐이다. 그 넷을 등진 채 서 있는 노신사의 눈길은 선체 바닥을 향하고 있다. 노신사는 도수가 꽤 높은, 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고, 손등에는 세월의 흔적이 패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우리의 시선으로 관찰할 뿐이다. 격자무늬 철조망이 페리와 바다를 구분 짓고 있다. 페리는 ‘강철로 된 섬’이다. 그 섬 위에 여섯 명의 승객이 각자 따로, 자기만의 생각에 침잠한 채, 대도시를 코앞에 두고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공간적 배경은 뉴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아르노 피셔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네거티브필름 활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피셔는 그중 가장 선명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방법을 선택했다. 이 작품의 핵심 포인트는 뉴욕이 아니라 머리 위에 얹힌 노신사의 손이다.
1950년대 베를린에서 찍은 사진들, 러시아나 인도, 폴란드,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들, 심지어 인물사진들까지, 아르노 피셔의 작품 대부분은 여러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 사진 속 인물들과 어울리고, 무심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를 적극적으로 유추하면서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그 작품들을 고도로 농축된 이미지로 간주할 수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 속에서 일정한 질서를 찾기 위해 탄생한 직관적 복합체, 그렇게 찾아낸 질서를 표현한 이미지로 바라볼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심리학적 관점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여러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작가의 심리를 분석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위 세 관점, 즉 눈에 보이는 스토리텔링과 농축된 조합물로서의 캐릭터 그리고 인간 심리 차원에서의 관찰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동자 밀집 지역인 베를린 베딩 지구에서 태어난 피셔는 겸손과 절제야말로 대도시 출신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고상한 미덕이라 여겼던 아티스트로, 지루하고도 힘든 자신의 작업 방식을 다음과 같이 간결한 말 한마디로 정리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를 찍는다면, 사진에서는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 그 이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2]
60년에 가까운 작품 활동 기간 동안 피셔는 수천 장의 네거티브 필름을 촬영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일찍이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정립했다. 피셔는 자신과 작품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고, 그 때문에 활동 기간에 비해 비교적 짧은 작품 목록밖에 남기지 않았다. 정식으로 공개한 작품이 몇백 장밖에 되지 않을 정도인데, 그중 대부분이 흑백이다. 본 전시에서 소개할 작품, 본 도록에 수록된 사진들은 피셔의 작품 중에서도 진수 중의 진수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일상 속에서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들, 평범함 속에서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피셔 작품의 특징은 완벽한 평온함과 고요이다.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절 베를린에서, 혹은 1980년대 뉴욕에서 찍은 사진들임에도 불구하고 형언하기조차 힘든 평온과 고요를 품고 있는 것이다. 피셔는 결코 어떤 사건이 최고조에 치달은 시점을 포착하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는 늘 저 뒷배경 어딘가에 숨어 있다. 피셔는 대개 사진 속 개별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간, 어떤 지점을 향해 시선을 던지거나 그곳으로 몸을 향하는 순간, 혹은 그곳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등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지닌 당연한 특징에서 아주 살짝,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의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른다. 피셔는 “내가 굳이 무언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이미 하나의 작품”이라 말한다 우리의 삶이 이미 극적인 요소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일부러 드라마틱한 상황을 찾을 필요도, 상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피셔의 작품 중 일부는 영화의 스틸컷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시대에 뒤처져 멈춰 선 고독함을 전달하는 사진들도 있고, 매우 구체적인 상황을 조명한 작품도 있다. 미하일 바흐친(Michail Bakhtin)의 말을 빌리자면 피셔의 작품들은 시간을 밀집시킨 ‘크로노토프’라 할 수 있다. 바흐친은 “시간이 부피가 늘어나고 살이 붙어 예술적으로 가시화된다. 공간 또한 시간, 플롯, 역사의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시간의 특징은 공간에서 발현되고, 공간은 시간으로 인해 의미가 채워지면서 새로운 차원을 지니게 된다”라고 말했다.[3]
피셔의 전작(全作) 목록에 수록된 작품 중 최초의 작품은 전쟁의 포화에 휩싸여 있던 1943년 베를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해당 사진은 작가 자신이 성장한 지역이 폭격을 당한 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피셔는 16세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나치에 저항하는 공산주의 운동권 소속이었던 삼촌 집에서 자란 피셔는 작품의 토대를 이루는 데 있어 삼촌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이미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정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사이 피셔는 전쟁 포로가 되기도 했고, 스케치 수업도 받았으며, 동베를린의 바이센제 미술대학에서 조각도 공부했다. 그곳에서 동물 조각상들로 이름을 널리 알린 하인리히 드라케(Heinrich Drake) 밑에서 공부한 것이 나중에 피셔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말하자면 조형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발전시키고 작품 속 조형 규칙의 체계에 대한 확실한 감각을 배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라케 교수는 나치 정권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리얼리즘을 비롯해 이념적으로 동기 부여가 된 “추상적 개념은 세계적 언어”라는 자유의 약속에 대한 독일의 전후 토론에 피셔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후 피셔는 서베를린에 소재한 미술대학으로 학적을 옮기고, 본격적 사진 실험에 돌입한다. 흔히 보기 힘든 앵글, 1920년대 사진계에 일었던 아방가르드 물결에 따라 그래픽 구도를 강조한 사진들을 실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막다른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조각 작업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3년을 즈음해 베를린에서 제대로 된 사진 작업에 착수했다.
베를린은 아직도 폐허 상태였고, 냉전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했고, ‘6월 17일 민중봉기’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덕분에 오히려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강경파의 세력이 더 강해졌다. 그런데 그러한 거대한 정치적 이슈들이 피셔의 작품 활동에 큰 자극이 되지는 않았다. 피셔는 전후 베를린의 풍성했던 문화적 환경을 오히려 즐기는 편을 택했다. 당시 많은 미술 분야 아티스트들이 그랬듯 피셔도 연극과 영화를 가장 중요한 미디어라 생각했고, 대부분의 영감을 거기에서 얻었다. 극도의 절제미와 고도의 농축미, 그 속에서 절묘한 미학을 추구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가리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시민계급이 애써 감추려는 바로 그 사실을 표현하는 예술”이라 평한 바 있는데, 피셔는 잦은 공연 관람에서 커다란 영감을 얻는 동시에 네오리얼리즘의 영향도 받았다. 피셔의 눈에는 세상이 무대 그 자체였다. 그러한 인식은 초기 작품 몇몇에도 뚜렷이 드러난다.
1953년에 탄생한 세 장의 사진이 있다. 초기 걸작선집에 포함된 작품들로, 피셔의 이후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사진들이다. 한 장은 베를린 루스트가르텐에서 범퍼카 질주를 즐기고 있는 한 쌍의 커플, 한 장은 대관람차 앞 눈먼 소녀, 한 장은 벽의 균열을 찍은 것이다. 순간의 현실, 동작과 은유, 상징성 등 피셔가 사진을 통해 구사하는 언어의 다양한 차원들이 그 속에 다 녹아 있다. 나중에는 그 요소들이 서로 강하게 얽히기도 한다. 박공벽에 생긴 균열은 도시를 훑고 지나간 강력한 균열을 의미한다. 당시만큼 이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었던 때가 없었다. 놀이공원 매표소 앞에서 티켓을 손에 쥐고 있는 소녀는 어쩌면 그 시절 영화의 모티브가 될 수도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는 ‘피투성(被投性)’, 즉 ‘내던져진 존재’라는 화두를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단, 이때 소녀는 그러한 피투성을 드러내놓고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느낌을 은근히 체감하게 유도만 할 뿐이다. 범퍼카를 타고 있는 커플은 대개 “고립된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러한 인간들의 의사소통 불능 상태”[4]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초현실적이면서도 무질서하게 술렁이던 시대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셔가 그러한 압박감을 의도적으로 작품에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셔는 현실 속에서 목격한 그러한 사회적 압박감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주저하지도 않았다. 앞서 언급한 세 장의 사진들은 그 시절을 살아가던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본 사건, 역사책에도 기록된 그 큰 사건의 현장을 직접 촬영한 사진보다 당시의 생활상과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안과 예측 불가능성이 지배적이던 당시 상황을 장벽에 렌즈를 직접 들이밀었을 때보다 더 예리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 사진들을 이유 없이 “행인의 우연한 발견물”[5]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우연한 발견물이야말로 ‘본래성)’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커다란 파급력을 지닌 보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본래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현상적 차원에서는 사진적 인식의 정확성, 진실성, 진품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본래성은 1950년대 계몽주의 좌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실존주의 철학의 요체였다. 장 폴 사르트르의 주체이론은 인간이 “실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규정되는 존재”[6]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을 비본래적 존재,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 속으로 몸을 던져버리는 존재라 본 것이다. 하지만 피셔는 작품을 통해 그 사회적 역할 뒤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탐구한다. 피셔의 인물사진들은 그런 의미에서 본래적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사회가 정한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그 순간 심오한 고독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고, 크나큰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피셔는 촬영을 위해 인물들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기는 하지만, 그 작품들에게서 결코 관음적 터치는 느껴지지 않는다. 피셔의 사진들은 실존의 증거이자 그 실존을 규명하는 본질을 탐구하는 도구이다. 사르트르는 “진실로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두가 자신의 존재양식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각자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 자신만이 아닌 인류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뜻”[7]이라 말했다. 철학적 문제에 관한 사르트르의 사유 방식을 담은 이 말은 아르노 피셔의 작품 활동을 관통하는 일종의 도덕적 신념이었다.
1950년대 초반, 아르노 피셔는 자기만의 길을 걷는 사진가였다. 그 시절 동독의 공영 매체들은 ‘아지프로(agaitation & propaganda)’의 도구, 선전과 선동을 위한 도구였다. 사진들은 긍정적인 삶의 모습들, 사회주의 체제 다지기에 도움이 되는 모습들만 묘사해야 했다. 중간 지대나 경계 지역을 소개해서는 안 되었고, 존재 뒤에 숨어 있는 모습들(피셔가 늘 탐구하던 영역)은 고려 대상에 포함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금기 영역이었다. 당시 아티스트들은 넘치는 활기와 미래에 대한 확신만 제시해야 했다. 피셔처럼 회의적 멜랑콜리를 품은 시선으로 동과 서, 양 체제 사이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는 금물이었다. 그러나 피셔는 사회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에 공감하는 공정사회의 이념을 숨긴 적이 없다. 다만 현실이 이상에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작업 방향을 설정했을 뿐이다. 피셔는 작품을 시장에 내놓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가 찍고 싶은 사진만 찍었다. 생계는 방사선연구소 실험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것으로 이어갔다. 그러다가 1956년, 피셔는 바이센제 미술대학으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예술사진 학부 설립을 위한 초석을 깔았다. 그때까지 동독에는 없던 시설이었다. 그 덕분에 피셔는 지금도 열정이 넘쳤던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1955년, 피셔는 서베를린 미술대학에서 《인간가족 The Famaily of Man》 전을 접한다. 세계적 명성을 누리던 사진가이자 뉴욕근대미술관 사진부장인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전시로, 37개국에서 약 90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10년이 지난 그때, 스타이켄은 해당 전시를 통해 전 세계 모든 가족이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곧 휴머니즘이 추구하는 이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동시대 아티스트들 중에는 스타이켄의 그러한 의도를 역사적 사실에 위배되는 허구, “잠언적 진실의 집합체” 혹은 “역사가 지닌 결정력을 무시하기 위한 시도”[8]로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 사진가를 포함해 총 278명의 아티스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기꺼이 출품했다. 이 전시로 인해 아르노 피셔는 자신이 이미 전념하고 있던 삶을 담아내는 사진에 대한 방향을 더욱 확고히 했다.
그 시절 피셔의 작품 대부분은 분단된 도시 베를린에서 탄생했다. 피셔는 ‘공화국 탄생일’, 즉 동독 건국일 행사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적 행사에 참가했고, 서베를린의 추방자 모임이나 시위 현장, 놀이공원도 찾았다. 소비사회로의 전환을 주도한 서독의 ‘경제 기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현장인 스탈린 거리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의 공사장 등 어디든 이슈가 있는 곳이면 달려갔다. 그곳에서도 피셔는 공식 매체들이 ‘사진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장면과는 거리가 먼 사건들, 연출력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들, 한마디로 주변적 사건들에 집중했다. 1997년 페터 자거(Peter Sager)는 아르노 피셔가 “개인과 대중이 만나는 지점, 국가적 행사와 국민의 일상이 가차없이 맞닥뜨리는 접점들을 포착했다. 그 덕분에 그 어떤 사진보다 더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띠는 동시에 존재의 근원을 묘사하는 작품들이 탄생했다. 해당 사진들 속 간극은 아직은 동서의 간극보다는 개인과 사회, 현실과 프로파간다, 냉전과 냉골 사이의 간극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 시절의 긴장감과 무기력감, 삶에 대한 역설적이고도 황망한 느낌을 피셔만큼 사진 속에 강렬히 담아낸 작가는 아무도 없다”[9]라고 쓴다.
1950년대 베를린은 걸출한 사진가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장소였다. 억지로 봉합해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터지고 벌어지는 전쟁의 상흔들, 극적인 대비 속에서 시작된 재건 사업,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와 그에 따른 불안감, 전쟁 재발에 대한 공포심, 민간 교통수단을 구축하겠다는 의지 등은 샤르게스하이머(Chargesheimer), 프리드리히 자이덴슈튀커(Friedrich Seidenstücker), 헤르베르트 토비아스(Herbert Tobias), 윌 맥브라이드(Will McBride) 등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 모티브들이었다. 화가 양성 과정을 밟은 뒤 사진가가 된 미국의 맥브라이드는 1958년 베를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는데, 당시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남겼다. “이 좁은 공간 안에서 인물은 더 큰 중요성을 띤다. 카프카를 연상시키며 회색이 주를 이루는 차가운 배경 속에서 인물들의 자세나 움직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회색의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이 더 큰 온기와 인간미를 띠기 때문이다.”[10] 피셔에게는 그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파괴의 순간을 목도하고 군 복무와 포로 생활을 겪은 피셔로서는 ‘카프카스러운’ 베를린의 분위기가 저 먼 뒤편에 흐르는 배경이 아니라 가슴을 짓누르는,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눈물이 뚝뚝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피셔의 작품들 중에는 불안한 침묵을 암시하는 것들이 꽤 있다. 1958년 저녁 시간쯤 쿠어퓌르스텐담 거리를 누비는 세 여인은 다시금 서열 구조에 물들기 시작하는 당시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그 장면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 상황이 앞으로도 영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전, 피셔는 동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에서 한 장의 걸작을 남겼다. 시대상과 철학 그리고 심리를 마술처럼 조합한 작품이었다. 사진 속에는 이제 잘 정비된 폐허를 배경으로 여인 하나와 두 아이 그리고 전쟁의 화마를 이겨낸 운구차량 한 대가 보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고 있다. 사진의 초점은 운구차에 맞춰져 있다. 여인과 아이들은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매우 음울한 사진이다. 황망하지만 절대적인 사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주제는 그 시절 예술계를 지배하던 핵심 테마였다.
1958년 피셔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를 알게 된다. 피셔가 『미국 카메라 연감』에 자신이 베를린에서 촬영한 작품을 보냈는데, 당시 출간을 앞두고 있던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s』 예비 공개작들과 함께 벽의 갈라진 틈을 찍은 피셔의 사진이 같은 잡지에 나란히 실린 것이다. 프랭크의 작품을 본 피셔는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온 길이 옳았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고, 거기에서 묘한 기쁨을 느낀다. 1984년 피셔는 지난 시절을 회고하며 로버트 프랭크에 대해
마티아스 플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