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Move

전시평론

고은사진미술관 연례기획 2018

Don’t Move

작가
변순철
전시 기간
2018/09/08 - 2018/11/21

꽉 짜여진, 느슨한, 비스듬한

얼굴과 얼굴 사이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누군가 내앞으로 걸어올 때 눈동자는 피사체를 노리는 카메라처럼 분주해진다. 잠시 스치는 상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미리 카메라를 세팅하듯이 눈동자도 만반의 준비를 한다. 멀리서 점점 다가오는 실루엣,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윤곽이 드러나는 이목구비를 확인하기 위해 눈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최대한 집요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낮에는 얌전히 숨겨놨던 뻔뻔하고 노골적인 눈빛을 꺼내 상대를 맞이하는 것이다. 쓰리, , . 옆을 지나치기 직전 먹이를 낚아채듯 상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 복면을 벗겨 맨 얼굴을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정복감에 빠진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몰래 타인의 얼굴을 훔치는 쾌감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상대가 지나쳐간 다음에, 그 또한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게걸스럽게 핥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상대가 멀어지고 내 눈동자에는 그토록 보려했던 그의 이목구비가 아니라 뻔뻔하고 노골적인 타인의 눈빛이 잔상처럼 남는다. 내가 그에게 보냈던 그 시선을 그대로 되돌려받는 낭패감은 거리에 내린 어둠보다 차갑고 끈적하다.

 

    초상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어두운 거리에서 느꼈던 정복감과 낭패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사진이 아니라면 언제 이렇게 타인을 마음대로 붙잡아 놓고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 있을까. 전시장에서 대형 프린트된 얼굴을 바라보며 원고지의 오탈자를 찾듯이 점과 기미, 삐져나온 털, 짝짝이 모양의 눈과 눈썹 등 흠집을 촘촘하게 끄집어낸다. 이는 상대가 귀마개를 했을 때 반말이나 욕을 하면서 상대가 들을 수 없는지 확인하려는 심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결국 너는 들을 수 없고, 너는 볼 수 없다는 상황에서 묘한 쾌감을 얻는다.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나만 들을 수 있고, 나만 볼 수 있다는 우월감이 하나의 특권처럼 작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초상 사진은 그 치사한 권력을 나에게 되갚아준다. 전시장을 나서며 무심코 뒤돌아 봤을 때, 사진 속의 얼굴들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말이다. 눈으로 맛봤던 달달한 기분이 쓰디쓴 여운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사진 속 얼굴이 되돌려준 시선을 통해 보이는 것은 나의 얼굴이다.

 

    어쩌면, 초상 사진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사진 밖의 얼굴이 사진 안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두 얼굴이 마주하며 서로 시선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노골적이고 치사한 눈빛으로 상대의 얼굴을 보다가, 상대 또한 나와 같은 눈빛이라는 알아챌 때 급히 내 얼굴의 매무새를 챙기는 황망함에서 초상 사진의 효용을 가늠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골적이고 뻔뻔한 시선을 거두고 내가 본 타인의 얼굴과 타인이 본 내 얼굴이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닮았는지 차분하게 견주어볼 필요가 있다. 초상 사진을 바라본다는 건, 타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사진을 사이에 두고 의 생김새를 견주어 보며 서로의 시공간을 탐색하는 일이다. 변순철의 초상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프레임 안에서 서로 다른 피부색의 국제 커플(-)을 보며, 또 촌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참가자(전국노래자랑)를 보며 그들의 겉모습에서 시각적 호기심만 충족시킨다면 그저 동물원 구경과 다를 바 없다.

 

 

꽉 짜여진 : -

백인과 흑인 커플, 서양인과 동양인 커플, 레즈비언 커플과 게이 패밀리 등이 사진에 등장하는 변순철의 〈짝-패〉는 앞서 언급했던 시각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한 프레임 안에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피부색과 생김새로 강한 대비를 이뤄 눈길을 끈다. 게다가 등신대보다 큰 사이즈로 프린트된 사진은 피부의 기미와 모공, 털 등 디테일을 숨김 없이 보여주면서 시각적 쾌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결코 인물들을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전면성과 견고한 프레이밍 등 완고하게 시선을 되돌려주는 사진적 형식 덕분이다. 

 

    우선 사진 속의 얼굴은 (뒷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제외하곤)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다. 커플이 등장하든 가족이 등장하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카메라 쪽을 바라본다. 커플이 침실이나 샤워실에서 나체로 등장할 때조차도, 둘만의 은밀한 눈빛이나 행위를 볼 수 있으리라는 관음증적 기대를 가볍게 저버린다. 옷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서로 안고 있든 떨어져 있든, 그들은 우리가 내심 기다리는 은밀한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사진 밖을 응시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몰래 훔쳐볼 수 없다. 이러한 전면성은흔히 인물 사진에서는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가 진지함, 솔직함, 그리고 피사체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간주[1]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촬영 과정에서 모델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정면을 찍은 아버스의 사진이 그토록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의 피사체가 그토록 상냥하고 솔직하게 카메라 쪽으로 자세를 취해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때문이다. 따라서 정면 자세야말로 피사체가 아버스에게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2]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사진과 변순철의 사진이 관객을 다소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 속 인물들이 지닌 외모나 신분 등에서 비롯되는 생경함이나 생소함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스 사진에 등장하는 난쟁이나 장애인, 변순철 사진에 등장하는 국제 커플이나 게이 패밀리 등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아웃사이더로 취급받을 뿐 아니라, 쉽사리 나와 다르다거나 이상하다고 여기는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아버스와 변순철의 사진은 그 선입견을 확인시켜주는 방식으로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의 일반적인 선입견 따른다면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움츠러들어야 할 대상이지만, 오히려상냥하고 솔직하게정면으로 취한 그들의 자세가 우리의 선입견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프레임이다. 작가는 -에서 전반적으로 상당히 타이트하고 견고한 프레이밍을 구사한다. 전신상의 경우, 일반적인 초상 사진에 비해 눈에 띄게 헤드룸(head-room)[3]이 좁으며, 어떤 사진에서는 화면 하단에 발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여유 공간을 두지 않고 프레이밍을 한다. 이러한 사진은 상하좌우 어디에서든 한치의 크롭도 허용하지 않는다. 몇 밀리미터 정도 크롭되도 무방한 스냅 사진과 달리 1~2mm만 잘려나가도 프레임의 긴장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숨막힐 정도로 꽉 짜여진 프레이밍은 단연 인물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나타낸다. 동시에 배경을 통제하면서 불필요한 정보가 개입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사진마다 인물 뒤로 생활공간이나 야외 공간이 살며시 나타나지만, 이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정보량은 그리 많지 않다. 때로 배경의 불필요한 정보들이 인물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거나, 과잉의 해석을 낳기도 하는데, -에서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에서 나타나는 전면성과 프레이밍 스타일에서 나타나는 접근방식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초상 사진보다는 건축 사진이 연상된다.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교감을 나누며 내면 심리를 포착하려는 전통적 의미의 초상 사진과 달리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교한 뷰포인트와 프레이밍을 통해 얼굴과 몸집 등 형태와 질감을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태도가 건축 사진과 닮았다. 그래서 -속의 인물들은 때로 수평과 수직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프레임 안에 직립한 건축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인물의 무표정은 건축 사진에서 외관이나 실내를 촬영할 때 최대한 행인이나 사용자를 배제하는 이유와 연결된다. 건축 사진에서 건물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또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 형태를 보여주기 위해 부수적인 요소를 제외하듯이 불필요한 표정과 몸짓을 개입시키지 않고 인물에 집중하는 것이다. 건축 사진을 닮은 초상 사진으로써 -는 마치 건축 사진이 설계도와 현장 사이에서 이상적인 건축 이미지를 추구하듯이 타인과 자신 사이에서 이상적인 형태의 초상을 완성하려는 자기-실험일지도 모른다. 점점 다인종 국가, 다문화 사회가 일반적이고 보편화되는 추세 속에서도 만약 -가 계속 주목받는 작업으로 남는다면, 그건 피부색이 다른 이색적인 커플을 보여준다는 측면이 아니라 완고하고 견고하게 초상의 형식을 실험했다는 점에서 연유할 것이다.

 

 

느슨한 : 전국노래자랑

방송국의 노래경연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참가자들을 촬영한 변순철의 전국노래자랑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전작 -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절제된 표정과 몸짓의 커플들을 꽉짜여진 프레이밍으로 담았던 전작과 달리 전국노래자랑에서는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참가자들을 느슨한 프레이밍으로 담았다. 녹화 당일 대기실이나 무대 주변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인물을 촬영해야 하는 전국노래자랑은 기본적으로 촬영 환경과 변수가 다양하다. 매번 녹화마다 장소와 날씨가 달라지고, 참가자들의 컨디션과 현장 분위기 또한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에서처럼 시각적인 톤과 온도 등을 철저하게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과 별개로, 방송 프로그램의 성격과 참가자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전국노래자랑은 전작과는 차별화된 형식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방송 프로그램으로써 전국노래자랑은 평범한 소시민이 노래와 춤 실력 등을 뽐내는 경연 무대이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특별한 이벤트를 만끽한다. 그들은 화려한 의상과 익살스러운 표정 그리고 과장된 제스처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주목받고자 애쓴다. ‘전국노래자랑에서만큼은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마음껏 에너지와 끼를 발산하려는 참가자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절제된 표정과 몸짓을 요구하는 일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 저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소시민들은 잘 짜여진 프레임 안에서 시각적으로 통제하는 일 또한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작가는 시각적 구성을 향한 욕심을 접고 한 발 물러서 프레임을 느슨한 상태로 열어둔다. 이제 프레임은 -때처럼 잘 짜여진 미장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고 싶은 참가자들을 위해 열린 무대로 변한다. 그들은 작가의 카메라를 무대 삼아 애창곡의 하이라이트 대목을 온몸으로 뽐내기 시작한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모습들이지만, 한 발 물러서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꽤 우호적으로 느껴진다. 어릴 적에는 몹시 싫어했다던 방송 프로그램을 훗날 우연히 보면서 대한민국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해 시작했다는전국노래자랑은 그 출발부터 작가 자신의 호불호나 선입견에서 탈피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한때 전국노래자랑에서 싫어했던 건 어떤 모습이며,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한국 사회의 단면은 또 어떤 모습일까?

 

    변순철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시골집에 가면 어김없이 나오는 전국노래자랑을 싫어했고, ‘전국노래자랑에서 나오는 트로트 음악을 싫어하고, 그 트로트 메들리에 몸을 흔드는 고속버스 댄스를 몹시 싫어했다. 이 모든 것이 구세대가 지닌 한국적 경박함과 천박함 그리고 세련되지 못한 취향의 결정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부의 칠순 잔치를 통해서 생각을 달리 하는 계기를 얻었다. 내가 아는 가장 성실한 사람인 이모부가 자신의 생일날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너무나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날 마련된 장기자랑 시간은 그야말로 전국노래자랑속의 한 장면 같았다. 모두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윗세대로 갈수록 자신만의 여가나 취미활동을 배울 기회가 적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따로 시간적, 경제적으로 투자하지 않은 채 의무 교육 과정만으로 얻을 수 있는 여가나 취미활동이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빠르고 손쉽게 할 수 있는 건, 기껏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정도에 불과하다. 언젠가부터 만인의 취미로 등산이 떠오른 이유도 따로 배우지 않고 당장 등산복을 구입해 산으로 향하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악기를 배운다든지, 직접 집을 짓는다는 식으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충분히 필요한 여가활동을 누리는 이들은 여전히 드물다. 그렇다면 전국노래자랑이나 칠순 잔치에서 순간적인 유흥에 과몰입되는 행태는 평소 퍽퍽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간접적으로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전국노래자랑을 작가가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 무대가 핍진한 현실에서 위안을 삼을 환타지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비스듬한 : 뉴욕

변순철의 초기작이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나중에 보게 된 뉴욕은 꽉 짜여진 프레이밍의 -와 느슨한 프레이밍의 전국노래자랑사이에서 넓은 진폭을 이룬다. 어떤 장면에서는 -를 연상시키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을 연상시키지만 묘하게도 꽉 짜여진느슨한사이에서 비스듬한프레임을 보여준다. 뉴욕시리즈에서 대부분의 사진은 수평축과 수직축 모두 15도쯤 비스듬한프레이밍을 구사하며, 촬영자의 뷰포인트 또한 인물과 평행한 정면이 아니라 15도쯤 비켜선 위치가 자주 확인된다. 여기서 비스듬한기울기가 또렷하게 느껴질수록 -에서의 꽉 짜여진프레이밍이 얼마나 견고하게 화면을 압박하는지 절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15도쯤 열린 비스듬한앵글을 통해 45도쯤 열린 전국노래자랑에서의 느슨함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대상을 포용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뉴욕-처럼 견고한 프레임으로 완성되지 않았고, 전국노래자랑처럼 대상을 여유롭게 수용하는 것도 아니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초상 사진의 접근법과 태도, 스타일을 모두 엿볼 수 있다. 이미 초기작부터 그의 작업을 읽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발아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고 주목할 지점이다.   

 

  

 

지금까지 변순철 작가의 세 시리즈 -, 전국노래자랑, 뉴욕을 프레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프레이밍 스타일과 연결된 형식적/내용적 함의를 기술하였다. 한 작가의 프레이밍 스타일에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형성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카메라를 다루는 습관 등이 반영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스타일로 완성되거나 고착된 프레이밍 방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무의식 중에 발현되기 쉬운 프레이밍 스타일이 세 시리즈에서 서로 구별되거나 그 변화 과정이 가시화되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다양성이 아니라, 이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는 작가만의 시선과 태도일 것이다.

 

    시리즈마다 프레이밍 스타일이 변화해도, 변순철의 초상 사진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 우리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변함 없다. 어떤 스타일을 구사해도, 그의 초상 사진에서 공통점은 인물들을 카메라 앞에 정면으로 멈춰 세운다는 것이다. 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게 아주 재빠르게, 또 쳐다보는 것을 눈치 못채게 몰래 셔터를 눌러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얼굴과 얼굴이 정면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카메라 뒤의 얼굴이 카메라 앞의 얼굴에게 외친다. “Don’t Move!” 카메라 앞에 있든 뒤에 있든 어떤 장면이 사진 속에 담길지 서로 예감할 수 있다.

 

    시선이 교환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사진(구경)은 대상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4] 수전 손택이 지적하듯 그건 약탈이나 살인의 승화에 까깝다. 타인의 얼굴을 약탈하지 않고, 또 반대로 나의 얼굴이 구경거리로 대상화되지 않는 초상 사진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 질문 앞에서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 드가의 말이 묘한 울림을 던져준다. 평소 자신의 스튜디오에 모델을 불러 촬영한 사진을 보며 수많은 그림을 그렸던 드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도록 만들어진 게 아닌가?’(On est fait pour se regarder les uns les autres, quoi?)[5] 그렇다면, 초상 사진 또한 서로를 바라보도록 만들어진 게 아닌가?’  이제 잠시라도 움직이지 말고 서로를 바라봐야 할 시간이다.

 

 

박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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