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페르소나
사진은 보이는 것을 찍지만 보이지 않는 것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측 가능한 궤도 위의 대상을 잠시 가두어 두었다가 예측 불가능한 궤도 위에 다시 풀어주는 행위이다. 가둠과 동시에 풀어주는 것. 사진은 단단히 침묵하며 이런 이중의 상태가 교차하는 통로가 된다. 죽음을 그 본질(ëidos)로 하는 사진과 현존의 관계[1]는 기술을 기반으로 변칙된지 오래이다. 오히려 사진이란 매체의 기능은 대상의 현존과 결별하면서 이미지의 체계를 더욱 복잡하며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즉 사진은 대상의 물리적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일부로 현존하고 있는 이미지의 속성을 독립시키는 일이다.
정희승의 작업은 이렇게 대상에서 독립한 이미지와 본다는 행위가 맺어가는 아찔한 관계들의 탐색이다. 여기에서 사진은 특정한 매체의 ‘본질’과 같은 문제로 귀결될 수 없는 가변적인 이미지의 실험으로 확장된다. 그의 사진들은 강력한 완결함을 지니면서 결코 고정되지 않는 문맥의 가변선 상에 놓인다. 이 이중적 상태는 보임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호출하는 긴장의 상태이자, 대상을 둘러싼 현실의 감각이 시적 미궁으로 변화하는 정교한 균형 상태이기도 하다.
예컨대 2013년 작품인 <untitled>에서 어느 공간 속 열린 두 개의 문은 이 곳과 저 곳이라는 명확한 구조적 구분 없이, 한 몸처럼 밀착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미로와 같다. 두 문은 안과 밖의 경계에 서 있기 보다,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열려 있다. 내부와 외부의 감각을 무력화시키는 이 두 개의 문과 알 수 없는 공간은 대상의 표면을 떠나지 않으면서 신비한 기하의 구획들을 만들고, 이미지의 숨겨진 심층을 드러낸다. 이것은 현실의 대상이 증언하는 기이한 꿈의 시선을 연상시킨다.
기호는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무수한 변수들을 단지 ‘그것’이라 지칭해버리는 완고함을 지닌다. 그리고 사진은 대상의 외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통해 기호의 완고함에 동참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정희승의 작업은 그와는 정반대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는 “불안정, 오류와 같은 결핍의 요소들은 사진을 매체로 작업하면서 항상 중요하게 다뤄온 어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희승의 작업은 사진이 실패하는 지점 위에서 시작되는 완고한 기호의 파기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카메라로 붙잡은 이미지의 내부와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형식적 변수들의 총체로 나타난다. 나는 정희승의 작업이 지니는 이미지의 완결성과 그것이 놓인 가변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증법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사진의 불안정한 모순과 마주하는 지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정신적 밀도와 리얼리티의 초월적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다. 아그네스 마틴의 연필선이 지니는 숭고한 울림과 같이 그의 사진에는 대상의 표면에 퍼지는 무한한 지평의 파동이 자리한다. 작가의 지표가 되는 연필선에 함축된 존재론적 추상처럼, 그의 작업에는 찰나 위에 투명하게 작용하는 작가의 시선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찍힌 얼굴은 보여주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의 대칭 속에 놓여 있다. 어느 인물의 사진을 가리키며 ‘누구’라고 부르는 무의식적 관행 속에는 한 사람의 존재가 하나의 외적 파편으로 수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정희승의 <Reading>에서 타인이 된 배우의 감정적 몰입의 상태는 보여주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의 대칭이 어긋나는 지점에 있다. 그들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을 현재 ‘누구’라고 지칭할 것인가? 그들은 그들이 연기하고 있는 인물의 상태인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상태인가? 그들의 얼굴은 양자 택일 할 수 없는 이중의 주체를 지닌 채 단일한 감정을 발현하는 표면이며, 검은 배경화면 안의 엄숙한 고해의 순간처럼 자기 내부를 응시하는 독백의 표면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타인의 신체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나의 실체 역시 그에 동화될 수 있다. 나 자신을 타인으로, 타인을 나 자신으로 바꿔 놓는 거울과 같은 상태는 하나의 신체가 재현하는 내적 현상의 명징성을 ‘속임수’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2] <Folly>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허구의 감정으로 채워진 얼굴이다. 그 얼굴은 내적 현시의 지표가 아닌 감정의 흉내로서의 가면이다. 그러나 그 가면은 감정을 투사하는 신체이기 때문에 허구이나 거짓이라 할 수는 없다. 메르로-퐁티는 완전한 대상은 반투명적이며, 숨겨진 어떤 것도 그 심층에 남겨두지 않는 시선의 현실적 무한성에 의해 도처로부터 침투된다고 했다.[3] 그러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없으며, 대상의 현시는 늘 불안정한 상태로 신체를 통해 부분적으로 경험된다. 사진이란 매체가 엄격히 수행하는 외피의 포착 속에 놓인 내부의 왜곡은 본다는 것이 빈번히 마주칠 수밖에 없는 착시를 수반한다. 정희승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의 다음 부분을 인용하며 <Folly>의 인물의 얼굴이 갖는 징후를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똑같은 한 가지의 외면적 현상이 정반대인 두 가지의 내면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두 가지 웃음이 있는데도 그것을 구별할 말이 없는 것이다.”[4]
이것은 그의 <Ghost>에서 스테레오스코피(stereoscopy)로 인물을 보았을 때 스치는 불안정한 일루전과도 관련된다. 바르트는 “이미지는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하지만,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며 흩어지고, 마치 잠수하는 인형처럼 내 어항 속에서 나를 흔들며,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했다.[5] 그러나 스테레오스코피의 비정상적 초점을 통해 언뜻 보이는 인물의 얼굴은 하나의 주체를 완전히 현시할 수 없는 이미지의 근본적인 결여를 나타낸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상징되는 인간의 눈은 두 개의 눈이 아니라 하나의 눈이며, 우리의 두 눈이 서로 약간 다른 이미지를 본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이러한 단안의 모델은 두 눈으로 보고 그것을 단일 시점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상(像)에 대한 합리적 접근의 역사를 담는다.[6] 정희승은 스테레오스코피를 통해 두 개의 눈과 단일 일루전 사이에서 일어나는 균열들에 접근한다. <Ghost>는 두 개의 눈이 각기 본 두 개의 이미지를 우리의 두 눈으로 다시 한번 결합하게 만드는 일루전을 통해,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한 이미지란 없으며, 시선은 순식간의 유령처럼 모호하고 파편적인 현시 속에 불안하게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지가 지니는 숙명적인 결여는 정희승의 작업에서 대상의 현전에 대한 자유로운 가설들을 제공했다. 여기서 다시 2013년 <Untitled>의 두 개의 문으로 돌아가 보면, 그 문들은 문 뒤의 공간을 보여주지 않지만 결코 은폐하지도 않는다. 두 개의 단순한 구조물의 경첩이 움직이면, 머리카락처럼 우거진 푸른 나무의 잎들이 우리 앞에 출현해도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희승의 작업에서 작품을 배열/배치하는 편집의 방식은 하나의 사진을 전혀 다른 맥락 속으로 이동시키는 열쇠처럼 작동한다. 또한 문을 열었을 때 불현듯 마주친 식물의 비정형적 움직임은 공간을 구획하는 직선적 대상을 회화의 붓질 같은 원초적 영역으로 전이시킨다. 이것은 다시 측정과 절단의 장비, 지팡이가 함께 있는 정물 사진과 대비되기도 하고, 무성한 풀들 사이로 장비나 지팡이처럼 서 있는 나무의 굵은 선들, 그리고 철근이 솟은 단단한 시멘트 표면의 추상적 공간이 갖는 기이한 유사성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물론 이러한 에디팅(editing)에서 그의 사진이 뚜렷한 서사를 지지하는 장면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텍스트의 조합이 가진 의미의 무한한 가능성은 사진의 대상 속에 은닉되어 온 사유의 끊임없는 발굴이라고 볼 수 있다. 정희승의 사진에서 대상의 물적 속성은 단편적인 기표의 불확실성과 강력히 맞닿아 있다. 이것은 사진에 위탁해 온 고유한 대상에 대한 도도한 확신이 방향 전환이나 구멍, 마술과 같은 장치들을 보존하는 범주, 즉 실재하는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의 조밀한 교차로 전환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만든다.
이렇게 정교한 배열과 배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맥락들은 사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피사체들 사이의 데페이즈망을 하나의 조건으로 지니고 있다. <Reflector(2010)>의 경우,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있는 공간을 가로 막으며 낯선 사물이 틈입한다. 사진이 현실과 갖는 밀도 안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사진이 입증하는 지극한 현실을 도구로 행해지는 마술과도 같다. 그는 매달아 놓은 가는 선을 노출하여 이것이 의도적인 장치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이한 타원형의 물체 앞에서 정연한 공간을 가로막고 선 전혀 다른 세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정희승이 선택하는 대상은 관례적 상징을 틀을 지닌 것이 아닌, 그 사물 자체의 표피가 스스로 발화하는 초월적 언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의 내부는 물론 <Descendant(2013)>나 <Curtain(2013)>처럼 이미지의 방향을 뒤집거나 뒤트는 것을 통해서도 두드러진다. 그의 사진에서 하나의 사물이 하나의 신체처럼 의인화되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신체가 선험적으로 재현해 온 인식의 틀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소양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현실을 통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사진의 관습적인 발성이 제공한 언어들의 시적인 가능성이다. 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언어는 없다. 시는 언어가 지닌 통시적 의미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을 거부하고, 원초적 언어가 밟아가는 외진 길에 기거한다. 정희승의 사진이 지니는 형식적인 힘은 보는 행위에 대한 합리적이며 반성적인 정의들 너머의 시적 침묵을 발화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침묵의 발화는 2013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있었던 그의 전시 제목이기도 한 ‘부적절한 은유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은유는 언제나 말과 자의적인 관계를 갖기 때문에, 부적절할 때야말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을 자극하고 어법의 관습에 파열음을 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전시의 배치에서 종종 사용하는 대쉬(dash)와도 무관하지 않다. 에밀리 디킨슨의 독특한 작법 부호이기도 한 대쉬는 그 해석에 따라 많은 여지를 남기지만, 가늘게 떨리는 시인의 자의식을 밝혀내는 언어의 호흡이다. 정희승이 이미지 사이에 문장 부호를 암시하는 것은 그의 사진들을 완결된 의미와 거리를 두는 방식이며, 직관적인 또 다른 시퀀스 안에서 호흡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정희승의 <장미는 장미가 장미인 것(Rose is a Rose is a Rose, 2016)>은 하나의 사물을 둘러싼 규범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외형이 순순히 내보이는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을 통해 본질적인 직관에 도달하고자 한다. 사물은 물리적인 자연 법칙의 영향 속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사물의 표면이 이루는 가시적 현상들로 세계를 경험한다. 불순한 배경을 없애고 작가가 선택한 장미라는 대상을 계속해서 찍어나가는 장미의 초상은 이 세계에서 장미를 장미이게 하는 요소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의 결과물이자, 하나의 대상으로 집요히 다가가는 반복적 프로세스를 통해 사물의 일차적 감각을 찾아나서는 일이다.
그것은 자연 과학의 객관적 이성을 호출하지 않고, 장미 자체가 발현하고 있는 장미의 본질을 신체의 감각적 사유로 이해하는 여정이다. 정희승은 사진이 지니고 있는 현존의 증빙을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유형학적 변수와 그 세부의 변화를 인식하는 도구로 환원하여 잠정적인 ‘앎’에 이른다. “장미가 장미인 것”은 장미가 한 때 그 곳에 존재했다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성을 체현하는 표면의 언어를 포착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는 단일한 이미지와 그 연속적 이미지라는 베셔(Becher) 식의 모더니즘 사진의 전통과도 연결되며, 대상의 일상적인 차원들을 제거했을 때, ‘나’라는 주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역학과도 관련된다. 장미가 장미인 것은 장미 자체와 장미를 보는 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성의 냉담한 회복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세계 속에 사물과 함께 거주한다. 이 거주함은 실존의 수단이자 물리적 조건이다. 하이데거는 거주함을 ‘평화롭게 됨’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어떤 것을 처음부터 그것의 본질 안에 그대로 놓아둘 때,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오로지 그것의 본질 안으로 되돌려 놓아 간직할 때 일어난다고 설명한다.[7] 한편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라는 강연에서는 횔덜린의 ‘시적인 것’을 본질적인 인간의 거주함의 관계로부터 통찰한다.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거주’라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시적인 것에 바탕을 둔, 그리하여 시가 거주함을 비로소 하나의 거주함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8]
여기서 ‘거주함’의 실존은 사물적 조건과 시적 조건의 합일 하에서 가장 온전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이중적 조건은 사진이 피사체의 현시를 냉담히 구현하는 이미지로서의 거주와 시적인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존재 방식과 연관된다. <장미는 장미가 장미인 것>은 사물의 참된 현상이 담담하게 펼쳐 보이는 시적 발현에 대한 공시적인 목격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본질과 변화라는 이질적 상태의 공존으로 이루어지는데, 장미라는 물질이 시간을 담아가는 변화 과정들은 그것이 세계의 지평에 굳게 발을 딛고 실재하는 거주함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매 순간 사라짐을 바라본다. 사진의 ‘가두어 둠’이란 그러한 사라짐에 대한 불안한 방어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가두어 둠’ 역시 사라짐을 수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본다’는 행위 속에는 잠시 내가 보는 대상으로 동화되는 주체의 ‘사라짐’의 순간이 있다. <사라짐(Disappearance, 2016)> 시리즈에서 <Cat 1>과 <Cat 2>는 또렷했던 고양이의 이미지가 투명히 사라지는 두 개의 찰나를 다룬다. 고양이는 점차 투명해질 뿐 아니라 화면의 스케일 역시 변화하며 곧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또렷한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잠시 그 대상이 되어버린 보는 이의 자기의 상실은 고양이가 작고 투명해질수록 서서히 뚜렷한 자기 인식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정희승의 ‘사라짐’은 보는 행위에 대한 일깨움, 사진 현존에 대한 신비한 우화를 지니고 있다.
각각 성냥의 앞면과 뒷면인 <Untitled(Palmistry)>과 <Untitled(Phreology)>의 수상학과 골상학 역시 한쪽 면의 부재를 통해서만 보일 수 있다. 보는 이의 관심을 끄는 손금과 뇌구조의 이미지는 잠시 우리의 인식이 그 대상에 오롯이 장악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Reading>의 배우들이 자아와 타인의 경계에서 대사를 읽어내려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도달하는 감정의 현시를 보았다. <사라짐> 역시 보는 이가 대상과 자기 사이의 경계 위에서 목도하는 사라짐이다. 더욱이 사진은 한때의 현존에 대한 불안정한 증거가 되지만, 한 장의 이미지일 뿐 존재를 구현하는 모든 물질적 요소가 사라질 때에만 가능하다. 즉 사진은 고정된 이미지로 나타나기 위해 사라지는 것을 만들어낸다.
사라짐은 사진의 이미지가 결코 그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반드시 거치게 되는 변용의 과정이다. 정희승의 사진은 세계 속에서 운동하는 대상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에 찍힌 대상의 이미지가 텍스트로 지속되는 방식과 연계한다. 사진의 고유한 리얼리티는 대상의 대치가 아닌 대상의 외양이 흘린 얇은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파편을 재현의 상태로 이끌고 가는 것은 작가의 눈과 직관에서 비롯된 수많은 장치의 총체적 결합이다. 정희승의 작업이 기존의 사진이 지닌 관습적인 조건들에 무심해 보이는 대신, 회화의 평면이 제기해 온 다양한 문제 의식과 긴밀히 관계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그의 사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도려낸 예측 가능한 운동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의 작업에서 지속성이란 멈춰 있는 사진 속 대상을 바라보았던 이의 지속된 시간이며, 또한 멈추어 있는 그 사진 속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지속되는 시선이다. 사진이 언어는 아니지만 리얼리티의 명징한 인과관계를 통한 텍스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희승의 작업은 이미지라는 텍스트로 이루어낼 수 있는 무수한 문맥과 그 가능성을 형성하는 사진의 가변적인 페르소나와 같다. 그리고 이 문맥 속에서 사진의 리얼리티는 대상을 벗어나 세계를 보고 또 받아들이는 시선의 규정할 수 없는 지표들로 해체되었다가 구축되기를 반복하는 무한한 퍼즐이 된다.
미술평론가 구나연
비가시적 전망 (Invisible Vision)
K는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들에 매혹당한다. 그것들은 예민하고 얇고 속이 비친다. 연하고 엷고 약한 것들은 바삭댄다. 그래서 크고 묵직하고 단단한 것들보다 소리가 많이 난다. 그 허하고 공한 기척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힘센 사람의 한 번 기침에도 부서지거나 바스러질 수 있는 취약함. 그런데 밟히거나 문드러질 때는 큰 것들보다 겁이 없다. 뒤척이는 소리 한 번 내고 이별하거나 흔적도 없이 꺼져 버릴 수 있다.
K는 M을 처음 보는 순간 비극적이고 불행한 것들에 매혹당하듯 끌렸다. 무언가에 매혹당한다는 것은 동일시를 전제로 한다. K가 M을 동일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몸의 역사를 지녔고, 또 너무도 닮은 몸의 비참함을 공유했다. M은 남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며, K는 성기가 돌출된 남자의 몸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M은 가슴 달린 자신의 몸이 낯설었고, K는 가슴 달린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M은 오갈 데 없는 고아 같았고, K는 발가벗은 바람난 과부 같았다.
그들은 타고난 몸으로 살고 이성의 몸을 좋아하라는 ‘법‘에 순응하지 못했다(않았다). 무작정 당연시하는 법이건만, 그래도 법을 어긴 자는 죄인이 된다. 죄인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잠식당한다. 그들은 법대로가 아닌 욕망대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한 욕망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개인의 안정과 사회의 승인을 무르고 영혼의 불안과 소외의 처형을 받기로 했다. K와 M은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둘은 기억의 그물이 성글다. 무의식의 전략이다. 전략은 고통스런 기억을 삭제해 주는 대신 몸에 수치심을 새겨 두는 것이다. 부정적 사건이 다뤄지는 방법 가운데 망각은 가장 억압적이다. 걸려들었다. 무의식이 전략을 휘둘렀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목적은 생존이다. 변연계와 대뇌피질을 교란시켜 고통스러운 정서와 갈등을 완화하며 자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돌연변이로 취급되더라도 그 방법은 그리 유해하지 않았다. 삶은 매 순간 최선의 길을 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기의 최선으로 두 사람은 ‘몸 바라보기‘ 여행을 떠났다. 망각의 호사를 누려 봤으니 이제 구멍 난 기억과 낯선 몸뚱이를 만나볼 때다.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떠나 봐야만 머물렀던 자리가 덤덤히 보이듯, 뭉개고 앉아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엉덩이 밑을 보려는 것뿐이다. 여행 중에 맞닥뜨리는 생소하고 변덕스런 공기에 신기해하고 유쾌해지듯이, 때로는 지루하거나 위험한 순간을 통과하면서 자기만의 동굴로 침잠하거나 서로의 곤혹을 위로하듯이, 그들의 여행도 그랬다. K와 M은 여행길에 많이도 떠들어 댔다. 왜곡되거나 상처받은 기억을 배설하는 구토봉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얘기하며 울고 웃다가 마음결이 닿는 곳에서는 말하기를 멈추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기억이 실재하는 몸에 접근할 수 있도록(혹은 몸을 통해 기억에 접근하도록) 옷을 벗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원초적인 몸의 신호를 읽고 몸과 대화를 나눴다. 언어는 말이 안 된다. 원래부터 해석 불가한 말이었다. 그래서 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여행의 본질이 귀환이듯 두 사람의 여행도 끝이 났다. 서로에 대한 동일시의 꺼풀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몸을 비루하고 굴욕적으로 바라보던 시선도 거두어졌다. M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이 낯설지 않다고 말하며, K는 자신의 몸이 그냥 그렇다고 생각한다. K는 이제 집으로 돌아와서 무엇이 남고 무엇이 버려졌는가를 떠올린다. 딱히 버려진 것도, 이렇다 하게 남은 것도 없다. 다만 벌거벗은 몸을 휘청거릴 때 통쾌하고 자유로웠으며, 적절한 한때 신나게 잘 놀았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은 자기만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우리가 뭘 했냐는 듯이, 우리가 뭘 어쨌냐는 듯이.
K는 바란다. 세상에 슬퍼서 아름다운 존재들은 무엇이 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비극과 불행의 냄새가 조금은 풍기기를. 진동하는 냄새는 대상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풍김은 그것이 거기 있다고 알아차리게 하니까 말이다. 나에게 주도권이 없는 고통을 껴안는 일은 행복해져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존엄을 보존하고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K는 자신이 예민하고 얇고 가벼운 존재여도 괜찮다고 한다. 여리고 약하고 속이 비치는 존재들과 계속 내통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아픔을 같이 한다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타인을 껴안는 긍정의 야합이다. 우연적인 것과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것과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것을 버무려 놀아 재끼는 일이다.
기억의 가소성 (Plasticity of Memory) (2012-2013)
작년 겨울에도 그의 기일을 기억해 내기 위해 메일 보관함을 열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메일의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반복하는 게 12년째인가, 13년째인가. 그의 기일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장터의 매섭던 바람은 온몸이 기억한다. 바람이 불면 온갖 상실감과 그리움이 덤벼들어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형상화되기도 하고, 무의지적인 기억이 소환되기도 한다.
비자발적인 망각과 기억은 축복과 저주의 경계를 넘나든다. 자발적인 기억에서 한 번도 포착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 때로는 비자발적인 기억의 순간에 맥락 없이 들이닥치기도 한다. 이는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감각 사이에 어떤 동일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그것을 떠올리는 시점에 물직적인 세계와 분절되어 관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은 신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획득하기에 몸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기억은 제멋대로 생성ㆍ왜곡되는 성질이 있다. “외력에 의해 변형된 물체가 그 힘이 제거되어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영구변형을 남기는 “가소성”처럼, 기억 또한 부조화ㆍ파편화라는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기억의 특성을 (특수)분장이라는, 역시 조작적이고 인위적인 프로세서를 통해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기억이나 트라우마를 시각화하려 하였다. 분장은 무속과 주술에 뿌리를 둔 것으로, 가면보다 내적으로 훨씬 밀착된 자기 표현이다. 이는 적극적 투사를 가능하게 하여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참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20대 남ㆍ여 지원자를 모집했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필사의 승부를 겨뤄야 하는 현시대 20대들의 공통적인 기억과 상처가 있을지 궁금했다. 촬영을 하기 전에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그날의 나에게’ 중, 한 가지 주제를 선택해 편지 형식의 글쓰기를 제안했다. 누군가에게 발송할 목적은 아니다. 부모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혹은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만의 특별한 시간과 조우했을 것이다. 편지를 쓴 후 카메라 앞에 앉은 참여자들은 여전히 어떤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이것 또한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는 기억의 참상이여.
한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