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흔적을 넘어서는 불멸의 초상[1]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한국 문학과 예술의 핵심적인 작가, 화가들의 모습이 있다. 100명이 넘는,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다. 그들과 함께 문학이나 미술을 사회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의미의 깊이를 더한 비평가, 출판인, 지식인들의 모습 또한 만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문인이나 화가들의 모습을 다 볼 수 있으니 특별히 반갑다. 이들과 함께했던 그 시대의 모습이 사진을 통해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들의 표정, 몸짓, 시선을 통해 한국의 문학이나 미술이 펼쳐온 긴 여정의 출발점, 그들 각각의 예술적 기운이 태동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이런 모습, 그때 이 시선으로, 이 표정으로, 우리 문학과 예술이 탄생했다는, 그 역사적 순간을 이들의 표정과 주변 상황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사진들은 한국 문학과 예술의 내면까지도 느끼게 하는 매우 특별한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표정은 존재의 의미에서 시작해 존재의 다정함으로도 이어진다. 이분은 누구시고, 저분은 누구시네... 하는 존재와의 대면을 통한 정체의 확인과 더불어 이분들 각각이 지닌 섬세한 표정을 담아낸 사진들이, 이 존재들과의 만남을 한층 다정한, 인간적인 만남의 장으로 인도한다. 삶의 모습이 느껴지는 이런 다정함이나 소박함은 오직 정직한 사진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가치일 것이다.
아울러 이 사진들은 지난 수십년의 세월을 담고 있기에 한국 사회, 그 시절 사람들의 열정과 더불어 시대적 의미를 또한 전해준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가 숨가쁘게 변화해온 현장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으니 이 사진들이 지닌 가치는 시대의 초상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특별하다.
그래서 이 사진들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렇게 정직한 시선으로 포착된 인물들을 통한 한 시대와 예술의 생생한 모습일 것이고 둘째는 그런 섬세함을 전해주는 사진 자체의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1970년대의 탄생 -문학, 시대와 더불어
이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1960년대 이후 한국 문학과 예술의 현장, 바로 현대문학과 현대미술의 탄생지를 정감과 솔직함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기를 통해서라면 누구나 이런 사진을 남길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지나치게 사회, 경제적 소재에 매달리거나, 한편으로는 시각적 효과에 치우칠 수도 있는 것을 넘어서서 이런 정직한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이 사진들을 통해 우리는 사진 저 너머의 것까지, 존재하는 그것 자체를 냉정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인지할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단지 그것만의 존재 가치를 넘어서 그 이면의 또 다른 가치까지 가늠하게 만드는 이중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너머의 존재 가치라는 말은 어떤 사실의 증명이나 증빙 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이고, 존재를 통해 그것의 의미 또는 진실까지 우리의 시야,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뜻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있는 고흐의 신발을 보고 농부의 신발이라며 헛다리를 짚은 채로 존재와 존재자라는 철학적 개념을 설명해 나갔지만, 헛다리를 짚은 고흐의 신발이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와 존재자를 감히 허물어뜨릴 수 없듯이, 이 사진들을 보는 우린 또한 어떤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생산하지는 못할지라도, 헛다리는 분명 짚지 않을 것이고, 마치 하이데거처럼 차원을 달리하는 상상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의 충분한 여지를 이 사진들이 이미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의 길에서 만나는 것은 소박한 일상, 인간적인 표정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의미나 깊이일 수도 있다. 굳이 심오한 무엇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 사진들은 1970년대,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래, 그때는 이랬지!”라는 사실의 회상과 더불어 깊은 상념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 사진들 속의 존재들, 그들 대부분이 시인, 소설가, 화가라는 사실을 넘어서 그들의 표정과 몸짓, 배경과 소품들, 빛과 어둠이 만드는 분위기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문학, 미술, 문화에 관한 역사적 특징을 감각적으로 만나고, 이성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의미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나 진실에 대한 감응과 인식은 사진가나 사진 그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진가의 시선과 사진을 넘어서는 감응자의 시선이나 태도 또한 사진과 함께 동시에 탄생하여 번쩍이는, 또는 신명 나는 합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그런 번쩍임이나 신명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통로를 이미 마련해 놓았다.
한편으로는 퍽퍽할 정도의 정직함이나 연출적 명암 대비를 구사하며 만들어낸 이미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단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는 묘한 매력이 보는 이의 시선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의 흥미로운 이미지 유도 방식을 통해 우리는 한국 문학이나, 예술, 문화의 내면을 짚어보는 즐거운 상상, 때로는 쓸쓸한 회고, 불쑥 튀어나온 잊혀진 기억 등등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상상, 회고, 기억, 여기 이들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1960년대 이후 한국 문화예술의 현대성, 그것의 탄생 순간을 그려볼 수도 있다.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주로 1970년대 이후 우리 문화의 핵심을 이야기하는 데 반드시 거론해야 할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는 한편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편중, 편파, 소외, 차이, 갈등, 외침, 변혁 등에 관한 개선의 의견 표방이나 실천행위가 여러 갈래에서 일시에 폭발했던 시기이다.
1940년 전후에 태어난 신세대의 등장은 이런 새 출발의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여기 놓인 사진들 가운데는 이미 그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도 있지만, 이 책에 실린 문학 분야 사진에서는 그 인물들 대다수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신인으로 등장해 1970년대에 문화적 의미를 정착시키고 확대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시인들의 경우, 사진집에 배열된 순서를 따라가 보면, 이들 시인만으로 한국 시문학의 역사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조금 치우치거나 일부에 그쳤을지라도 그것은 사진가의 책무가 아니니, 이 시인들의 모습만으로도 한편 충분한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시인들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이전의 한국 시와 이후 1970년대 중심으로 새로 탄생한 한국 시의 일면을 느낄 수 있다.
소설가들의 사진은 시인들의 사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 문학이 소설에 편중된 것은 분명 아니니, 이 책에 실린 사진으로만 본다면, 어떤 보이지 않는 시선이 이렇게, 소설에 편향되고 소설가들에게 편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시선의 정체를 추적해 본다면, 970년대를 전후해서 문학에서도 산업화, 대중화를 꾀하면서 사진이 소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틀에서 효용성을 발휘했음을 짐작할 수도 있다.
이렇게 1960년대, 70년대를 기반으로 움트기 시작한 한국 문학의 새로운 기운이 이 사진들 속에 담겨있다. 마치 이집트 미술의 특징이었던 ‘정면성의 원리’가 그리스 조각에서는 그보다 역동적인 몸짓으로 바뀌었듯, 이 사진들 속의 몸짓과 표정 또한 굳이 사진가의 어떤 포착 의도나 시점과 더불어 시인, 소설가들의 태도와 몸짓 또한 새로운 초상 사진을 향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비록 사진기 앞에서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사진가와 함께 새로운 장면을 향해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사진들은, 이 사진 속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그들의 문학 작품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보는 즐거움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삶이 크게 다를 바 없고, 누구든 자신의 노동에 집중하는 진지한 태도와 열정을 지닐 것이지만, 시인 소설가들의 사진을 이렇게 많이 한곳에 모아놓고 주목해 본다는 행위에는 반드시, 그들의 노동이나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문학비평가들의 사진 또한 여기에 있다. 1960년대에 움트기 시작해, 마침내 1970년대에 꽃을 피우고 1980년대를 열어젖힌 한국 문학의 새로운 탄생 시기, 새로운 대상과 화법을 찾아 나섰던 그 출발지의 모습이 바로 이 사진들 속에 있다.
몸짓과 표정으로 쓴 한국 조형 예술의 역사
문학이 시대정신이나 문학성을 통해 1970년대라는 한 시기를 완성했다면, 미술에서는 조형예술의 문화를 사회적으로 정립하면서 그것의 가치를 공유하는 확장의 시대를 이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문화생산 주체의 활동이 전 시대에 비해 크게 확대된 점은 분명하다.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의 사진은 사진가 주명덕의 사진부터 이 책에 등장한다. 앞에 등장한 문학인들의 몸짓과 비교해서 본다면, 문학인들은 비록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그리스식인 클래식 분위기가 다소 배어있다면,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의 사진은 그보다는 더 일상적인 몸짓이다.
이들의 모습 또한 앞서 언급한 시인, 소설가들처럼 그들의 작품과 함께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아야하는 점은 같지만, 시인, 소설가들의 초상은 한층 더 강조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문학, 특히 소설이 플롯을 구성하면서 ‘문제적 인간’을 다루는 데 집중하고, 그것을 오직 언어라는 매우 개념적인 기호로 표현하는 까닭에 그 ‘문제적 인간’을 다룬 사람의 얼굴을 마치 한 장의 삽화처럼 삼는 데에 적절하기도 하다.
화가들의 얼굴은 이미 그들의 미술 작품이 시각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특별한 개인사를 지닌 경우가 아니라면 작품 이미지가 인물에 선행한다. 화가들을 다룬 사진들은 한편으로 작업 과정이나 공간을 들여다보는 데 더 중요한 가치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사진들은, 문학이 몰두하는 ‘문제적 인간’보다는 공간과 환경이 작품으로서 출가하기 이전의 속세 풍경을 통해 표명성 또는 물질성이라는 미술 작품의 원천요소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은 문학적 이미지를 만드는 문학인들의 사진과는 또 다른 차원, 경우가 다른 물질적 경로이다.
1970년대 문학 매체가 사진과 더불어 새로운 인물들을 이미지화하는 데 신속하게 대응한 것과는 다르게 미술 관련 매체는 기존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전설화하는 데 관심을 쏟기 위해 사진 이미지와 손을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사진가의 역할은 과거의 신비화일 수도 있고, 현재의 단발성 외침이나 아우성일 수도 있고, 가득 찬 욕망의 가공자이거나 가공의 미래를 향해 현재를 버리는 일일 수도 있으며, 오늘 하루의 소박한 노동이나 무지개빛 좋은 꿈을 간직한 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진집의 화가들만으로 구성한 미술사를 따로 집필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인물들이 이 책에 다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 덧붙여 아쉬운 점을 이야기한다면, 시인들 사진은 조금 더 보완되고, 일제 강점기에 화업을 시작한 화가들만큼 이후 세대의 화가들 사진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가는 단지 예술가들의 한 순간을 일상에서 찍을 수밖에 없지만, 사진가의 뒤에는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거나, 반드시 인지할 필요까지는 없는 각각의 분야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성만을 강조한 사진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 사진들은 짧은 현장성을 노리는 그런 사진들이 아니기에 나의 아쉬움은 어쩌면 즐거운 상상을 담은 청탁의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이 사진들은 몸짓과 표정, 사진으로 쓴 한국 조형 예술의 역사와도 같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엄격한 감각으로 탄생한 존재와 존재감
이 사진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표정, 눈길, 몸짓, 손길 그리고 어떤 표정이나 모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이나 배경들...... 한 장 한 장, 사진 속으로 들어가다가 너무 많은 모습, 시대의 정서가 뿜어내는 분위기 때문에 숨이 차기도 하다. 그래서 한참을 멈추었다가 다시 사진 속으로 들어가 보지만 어떤 배경의 모서리에서는 다시 눈길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 사진들은 냉정하다. 그 냉정함은 약은 곧 또 하나의 독이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정직하다. 아주 순박한 당의(糖衣)만을 걸치고 있다. 기기묘묘한 수작은 부리지 않으려는, 한편으로는 그것에 집착할 정도로 과도하게 정직한 고집스러움이 있다.
달콤하지 않으니, 그런 정직함은 요즘의 관점으로 보자면 구식이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훨씬 전까지로 이 정직함을 이루는 시각적 태도를 거슬러 올릴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존재의 현전 방식에 관한 정직함이다. 여기의 흑백 사진들은 카라바조만큼의 극적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구사하지는 않지만, 마치 그것을 연상케 하는 극적인 명암이 존재를 드러나게하면서 존재감으로 나아간다. 존재와 존재감에 대한 연출 언어가 들어있다.
그래서 여기의 사진들은 다른 무엇인가를 발명해내려고 애쓰기보다는 존재와 존재감에 다가가는, 정직한 사실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다정하지는 않다. 아마 이 사진가의 성품도 그럴 것이다.
정직한 사실성이라는 말은 연출적 명암법에 가까운 표현 양식이 존재의 양태를 강하게 고정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자연스러운 사실들은 대개 우리 앞에 ‘놓여있다’. 책들이, 꽃병이, 또 그런 무엇들은 대개 심리적으로 놓여있지만, 이 사진가에게는 그 대상이나 존재들이 고정되어 있다. 흩어지지 않고, 강하게 포착 또는 포박되어 있다. 그런 포박을 움켜쥠으로서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놓아버리는, ‘방치된 사실’과는 다르다. 그래서 각각의 존재 형태들은 단단하다. 단단하게 고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꾸밈이나 장식이 불필요하다.
존재에의 집중, 그런 존재감, 바로 그것이 이 사진들의 정직함으로 빚은 가장 감각적인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며, 그런 존재감을 지닌 이 사진들은 분명 단 하나의 생명에 집중하는 불멸의 사랑 이야기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강운구의 이 사진들은 한 시대의 문화적 표정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순간의 흔적을 넘어서는 불멸의 초상이 될 것이다.
시인 박상순